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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모음

[인생] 1% 의 행복과 99%의 불행

 
1%의 행복과 99%의 불행


작은 딸이 학교에서 내준 자료에 보니까,
만약 지구상의 인구가 100명밖에 되지 않는 마을로 축소(縮小)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고 
스탠포드 의대 하터 박사가 조사(調査)하여 만든 표가 있었습니다.

 

57명은 아시아인, 21명은 유럽인, 14명은 서반구인, 8명은 아프리카인
52명은 남자, 48명은 여자
6명은 세계 부의 59%를 차지하고 있고,
80명은 수준 이하의 주거환경에 살고 있고, 
100명 중 70명은 문맹, 100명 중 50명은 영양부족 그리고


100명 중 1명은 임신 중, 
100명 중 1명은 대학졸업, 
100명 중 1명만이 컴퓨터를 소유...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좋은 집, 먹을 것이 있으며 글을 읽을 수 있고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면 아주 엘리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만약에 전쟁의 위험, 감옥에서의 고독, 고문에 의한 고뇌,
기아의 괴로움 등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세계 인구 상류 500만 명중의 한 사람인 셈입니다.



그리고 만약 고통, 체포, 고문 
또는 심지어 죽음의 공포 없이 매주 교회에 다닐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는 곧 지구상 30억 인구가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누리는 행운아입니다.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몸엔 옷을 걸쳤고,
머리 위로는 지붕이 있는데다 잘 곳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75% 보다는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고,


은행에 돈이 있고,
지갑 속에도 있고 어딘가 잔돈만 모아 놓은 동전 통도 있는
사람이라면 지구상에선 상위 8%의 부자에 속합니다.



만약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살아 계시고,
아직 결혼한 상태라면,
아주 드문...
미국에서마저도 아주 드문 경우가 될 것이고,


만약 고개를 들고 얼굴에 웃음을 머금으면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축복 받은 사람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곧 비록 대다수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대부분이 그러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고, 
어깨를 토닥여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곧 아픔을 치유해줄 수 있는 손을 내밀 수 있기에...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가 당신을 생각해주었음을 생각할 때, 
배가된 축복을 받은 셈입니다. 
게다가 지구상에 글자를 읽지 못하는 20억 인구보다 
축복 받은 셈일 것입니다. 




 


하터박사의 통계대로라면 컴퓨터만 갖고 있어도,
대학만 나와도 1% 상류층(上流層) 안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는데 저는 
도무지 그 사실들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믿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더 손해(損害)보며 살고 있고,
다른 사람보다 더 불행(不幸)하다고만 생각되어 지는 이유(理由)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비슷한 사람들이나 
자신 보다 더 나은 사람들하고만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들을 실감(實感)하며 살기는커녕 
상대적인 빈곤(貧困)감 속에서 
원망(怨望)과 불평(不平) 속에 살아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불행(不幸)이라는 것도
사실은 1% 안의 특권층적인 행복(幸福)을 소유하면서도,


의식(意識) 속에서만 99% 안에 있는 불행이라는 
'느낌의 불행'이란 말인가요....



석가모니는 16세 때 처음으로 궁(宮) 밖에 나갔을 때,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습을 보고서 받았던 충격이
후에 가출(家出)과 도(道)를 찾는 동기가 되게 했습니다.  



어쩜 우리도 궁(宮) 안이라는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처럼
오직 자신(自身)만이 답답하고 짜증나는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99%의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지금 자신이 느끼는 불편(不便)과 불평(不平)들이 사실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가를 곧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랑하는 자식은 여행(旅行)을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훌륭한 인격(人格)을 이룸에 있어서 
여행은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삶을 직접 경험(經驗)시키면서
그들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참된 행복(幸福)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책(冊)들은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산상수훈(山上垂訓)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오는 그 이야기의 핵심(核心)은
일반적 기준과 정 반대(反對)된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더해 줍니다.



산상수훈에서 말하는 복(福)이 있는 사람이란
물질(物質)적인 것이 아니라 심령(心靈)에 관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요
심령이 애통(哀痛)하는 사람이요 
그리고 긍휼(矜恤)이 여기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애통'이란 자신을 진정으로 돌아보는 마음이요
'긍휼'이란 의(義)와 사랑이 넘침으로 생겨나는 마음 곧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교회에 있다가 멕시코로 간 선교사의 닉네임은
'갈대(reeds)'입니다.


신은 우리 인간을 그의 닉네임인 '갈대'처럼
왜 이렇게도 연약(軟弱)하게 만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홈페이지에는 '갈대'에 대해 이렇게
부연설명을 해 놓았습니다.


'갈대는 약(弱)하지만 지혜(知慧)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약한 갈대는 어떤 비바람에도 폭풍우(暴風雨) 속에서도
부러지지 않는 지혜가 분명 있습니다.
저는 그 지혜가 바로 '긍휼'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부자(富者)는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에 만족(滿足)할 줄 알고
그리고 그 가진 것으로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가장 행복(幸福)한 사람이요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긍휼한 마음은 바로 나눔의 행복을 아는 사람에게 신이 주시는 
거룩한 은총(恩寵)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선택(選擇)해야 합니다.
평생 남만 부러워 하다가 불평(不平)하며 살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나의 행복(幸福)은 1% 안에 있는 행복임을 알고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히 여겨 
오히려 남을 격려(激勵)하는 
위로(慰勞)하는 자가 될 것인가...